
2016년 5월, 한국 영화계는 한 편의 영화로 깊은 충격과 긴 여운에 빠졌습니다. 바로 나홍진 감독의 세 번째 장편, 곡성입니다. 영화는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 사건과 그 배후에 놓인 정체불명의 일본인, 점점 악화되는 주인공의 딸 상태, 그리고 이를 둘러싼 무속과 종교의 세계를 통해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졌습니다. 곡성은 개봉 직후 흥행과 평단 모두의 극찬을 받았지만, 결말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수많은 논란과 해석을 유발했습니다.
10년이 흐른 지금, 2026년 현재에도 곡성은 다시금 조명되고 있습니다. 영화 분석 유튜브 채널, 팟캐스트, 대학 강의, 블로그, SNS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관점과 이론이 등장하며 ‘곡성 해석 열풍’은 여전히 뜨겁습니다. 과거에는 영화의 난해함에 좌절한 관객들이 많았다면, 지금은 각자의 신념과 세계관으로 이 영화를 새롭게 읽어내는 시대입니다. 특히 믿음, 구원, 악, 이방인이라는 상징 요소가 현대 사회의 불안과 교차하며 곡성은 단순한 스릴러가 아닌,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품은 작품으로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디테일의 미학: 장면마다 숨겨진 의미들
곡성을 한 번 본 사람은 "무섭다", "이해가 안 된다"는 말로 감상을 끝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본 관객이라면 이 영화가 단순한 공포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됩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디테일입니다. 나홍진 감독은 장면마다 숨은 장치들을 교묘하게 배치해 관객 스스로 수수께끼를 풀어가도록 유도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인의 첫 등장 장면. 비 오는 산속, 짙은 안개, 뒤틀린 프레임 구도 속에서 그는 등장하는데, 이 장면에서 그의 시선 방향, 동물의 반응, 카메라 움직임이 하나의 ‘악의 기운’으로 연출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악인지, 우리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인지에 대한 확답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영화 속 마을 사람들의 반응 하나하나가 눈여겨볼 디테일입니다. 모두가 일본인을 수상하게 여기면서도 뚜렷한 증거 없이 그를 배척합니다. 이는 한국 사회 내 깊게 자리 잡은 집단주의적 이방인 혐오 심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심지어 경찰 종구조차 처음엔 일본인을 미심쩍어하지만, 감정이 섞이기 시작하며 이성적 판단력을 잃고, 결국 파멸로 이어집니다. 딸 효진의 변화 또한 영화의 감정선을 이끄는 디테일한 중심축입니다. 그녀는 점차 다른 인물로 변해가지만, 관객은 그녀가 실제로 빙의된 것인지, 정신적 충격에 의한 변화인지, 혹은 가족이 겪는 모든 사건들이 종구 자신의 트라우마로 인한 왜곡된 시각인지 혼란스럽게 됩니다. 효진이 말하는 대사는 때론 철학적이며, 때론 공포스러울 만큼 직설적입니다. "다 죽여버릴 거야"라는 말이 단순한 빙의의 결과인지, 아니면 가정 내 억압된 감정의 폭발인지도 모호하게 남겨둡니다. 더불어 영화의 색채 사용, 인물의 의상 변화, 조명과 그림자 활용 등은 캐릭터의 감정 변화나 사건의 전조를 시각적으로 암시합니다. 무속인이 굿을 할 때 쓰는 붉은 천과 소리의 울림은 공포감을 배가시키면서도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사진, 의식 도구, 꿈속 장면 등은 모두 복합적인 상징으로 읽히며, 단 한 장면도 우연히 구성되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복선의 구조: 미스터리 장르를 뛰어넘은 촘촘한 설계
나홍진 감독의 전작들인 추격자와 황해도 복선과 구조적 치밀함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곡성은 그 정도를 한층 더 끌어올렸습니다. 이 영화에서 복선은 단순한 사건의 암시 수준을 넘어, ‘관객이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도록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영화 초반 일본인이 등장하며 개에게 공격받는 장면이 있습니다. 개는 본능적으로 악을 감지한다고 믿는 관객에게 이는 강력한 복선처럼 보이지만, 영화 후반 일본인이 죽은 동물들을 어루만지고 있는 장면은 그를 애도하는 이방인으로 보이게 합니다. 이처럼 동일한 인물과 행동이 전혀 다르게 읽히는 구조가 복선을 더욱 복잡하게 만듭니다. 가장 상징적인 복선은 사진입니다. 일본인의 집에서 발견된 피해자들의 사진, 그 사진이 불에 타면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 무속인 일광이 사진을 통해 사람을 조종하려는 듯한 연출, 그리고 마지막에 목사가 찍은 일본인의 사진은 도대체 ‘누가 누구를 조종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남깁니다. 이 복선들은 단지 줄거리의 퍼즐 조각이 아니라, 영화의 주제인 ‘믿음’과 ‘의심’을 관객에게 떠넘기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무속인 일광의 정체 역시 복선의 집합체입니다. 그는 처음엔 일본인과 대립하는 인물로 보입니다. 굿 장면의 강렬한 리듬과 사운드는 그가 마치 정화 의식을 집행하는 존재처럼 느껴지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는 종구를 혼란스럽게 하고, 이중적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순식간에 일본인과 같은 공간에 나타나 웃음을 지으며 꽃을 들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지금까지 믿었던 ‘일광=선’이라는 등식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복선입니다. 또한 성경 구절을 암시하는 대사와 장면 배치는 영화의 이면에 종교적 신학적 논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특히 목사가 “그를 믿지 말라”라고 경고한 인물이 누구인지 명확히 말하지 않음으로써, 관객 스스로 판단하게 만듭니다. 이는 단순한 반전 트릭이 아니라, 현대인이 신념을 잃은 시대에 진실을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라는 무언의 요청입니다.
엔딩의 충격: 믿음과 선택의 아이러니
곡성의 결말은 대한민국 영화사에서 가장 많은 해석과 논쟁을 불러온 장면 중 하나입니다. 종구는 선택의 기로에서 결국 일광의 말을 의심하고, 딸을 살리기 위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 순간 영화는 감정과 논리, 믿음과 두려움 사이의 모든 충돌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집에 도착한 후 벌어지는 끔찍한 결과는 관객으로 하여금 ‘결국 믿음을 저버려서 벌어진 비극’인지, 아니면 ‘누구도 믿을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결과’였는지 끊임없이 자문하게 만듭니다. 이 장면의 연출은 잔잔하면서도 강렬합니다. 음악은 사라지고,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파국을 보여줍니다. 종구가 무너지고, 딸이 처참한 모습으로 등장하며,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 관객은 절망감과 동시에 해석의 무한 루프에 빠지게 됩니다. ‘과연 악은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은 영화가 끝나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남습니다. 영화의 엔딩은 종교적이면서도 철학적입니다. 누구도 완전한 선이 아니었고, 누구도 완전한 악으로 단정되지 않습니다. 일본인은 악마인가? 일광은 가짜 무속인인가? 목사는 진실을 말한 것인가? 심지어 종구의 믿음은 자신의 감정에 따른 것이었는가, 아니면 딸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이었는가? 이 모든 질문은 해답 없이 관객에게 남겨집니다. 종구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빠가 지켜줄게"라고 말하는 그의 대사는 오히려 너무 늦은 선언처럼 들리며, 아이러니한 감정을 자아냅니다. 그는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현실을 마주하지만, 동시에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영화가 주지 않기에, 그 감정은 완전한 절망으로 귀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불완전함이 영화의 힘이자, 반복 시청을 유도하는 가장 큰 매력입니다. 곡성은 단순한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철학적 시스템이자 믿음 실험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공포라는 장르를 빌려 인간의 심리를 날카롭게 파고들고, '누구를 믿을 것인가'라는 단순한 질문을 통해 관객 개개인의 신념 체계를 시험합니다. 종교, 과학, 샤머니즘, 논리, 직관, 감정 등 인간이 위기를 마주할 때 내세우는 다양한 기제들이 영화 속에서 모두 충돌하고 붕괴됩니다. 2026년 현재, 이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은 단순히 옛날 영화를 회상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역시 거대한 혼란과 불확실성, 그리고 집단적 공포를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AI의 윤리, 가짜뉴스, 사회적 불신, 공동체의 와해, 전통 종교의 쇠퇴 등 현대인의 위기 앞에서 곡성은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악’은 외부에 있는가? 아니면 내부에 있는가? ‘믿음’은 선택인가, 운명인가? ‘진실’은 누구에게 속하는가?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그때 보이지 않던 복선이 보이고, 익숙했던 인물이 낯설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낯섦 속에서 관객은 다시 질문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과연 누구를 믿을 것인가?"라고.